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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보건소, 관내 거주자 1명과 2차접촉자 5명 진단검사 진행

27일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이날 0시 기준 코로나19 신규 확진자는 51명으로 누적 확진자는 1만2653명이 되었다. 신규 확진자 51명의 신고 지역은 서울 17명, 경기 17명, 대전 2명, 인천 1명, 충북 1명, 전북 1명, 대구 1명 순이고 검역 과정 11명이다. © News1 이지원 디자이너
27일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이날 0시 기준 코로나19 신규 확진자는 51명으로 누적 확진자는 1만2653명이 되었다. 신규 확진자 51명의 신고 지역은 서울 17명, 경기 17명, 대전 2명, 인천 1명, 충북 1명, 전북 1명, 대구 1명 순이고 검역 과정 11명이다. © News1 이지원 디자이너

(옥천=뉴스1) 장인수 기자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대전시 동구 거주 30대 남자가 충북 옥천군에 있는 한 업체 직원인 것으로 파악돼 지역에 비상이 걸렸다.

27일 옥천군보건소에 따르면 이날 오전 양성 판정을 받은 대전 105번 30대 남자 확진자가 충북 옥천군 한 업체 직원 10명(관내 1명, 관외 9명)과 접촉한 것으로 확인돼 역학조사와 방역에 들어갔다.

30대 남자는 옥천 직장서 근무 중 마스크를 착용했고 동료들과 구내식당에서 같이 식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군보건소는 이날 30대 남자와 직장서 접촉한 관내 거주자 1명과 2차 접촉자 부인 1명과 친구 4명에 대해 검체를 채취, 충북보건환경연구원에 진단을 의뢰한 후 자가 격리 조처했다.

관외에 거주하는 9명에 대해서는 해당 지자체에 통보 조치했다.

군보건소는 이날 해당 업체 곳곳을 소독한 후 폐쇄 조처했다.

검사 결과는 이날 오후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건강염려증은 몸에 이상이 없음에도 지속해서 걱정하는 증상이 6개월 이상 지속되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때 진단한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건강염려증은 몸에 이상이 없음에도 지속해서 걱정하는 증상이 6개월 이상 지속되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때 진단한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건강에 대한 적당한 걱정은 질병을 미리 발견하고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과도한 건강 걱정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라면, 혹시 ‘건강염려증’은 아닌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건강염려증으로 환자는 2716명이다. 다만, 건강염려증 환자는 자신의 건강염려증을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 실제 환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강염려증이란 사소한 신체 변화나 증상에도 예민하게 반응해 질병이 발생했다고 믿는 심리적 장애를 말한다. 주로 인터넷이나 주변 지인, TV 등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이 질병에 걸렸음을 확신한다. 병원 검사 결과 신체적인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아도, 이를 믿지 못하고 여러 병원과 진료과를 전전하곤 한다. 건강염려증 환자들은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매우 예민하다는 특징이 있다.

건강염려증의 진단 기준은 내과적·신경과적 검사 결과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에 심각한 병이 있다고 믿고, 이를 지속해서 염려하고 걱정해 과도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증상이 6개월 이상 지속되고, 과도한 염려로 인해 일상생활에 업무나 지장이 생기면 질병으로 판단한다.

건강염려증은 대부분 개인 및 집단 상담을 통해 과도하게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심리적 성향을 치료하는 것만으로 개선된다. 드물게 우울, 불안 증세가 동반돼 괴로워하는 경우 건강염려증이 악화될 수 있어 약물치료를 병행하기도 한다. 주변인에서 환자를 지속적으로 안심시키는 것도 도움이 된다.

6·25 전쟁 당시 서울 수복 작전에 참가한 국군 장병들이 거리를 수색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6·25 전쟁 당시 서울 수복 작전에 참가한 국군 장병들이 거리를 수색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전장에서 군대를 이끄는 장군,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할 국가적 결단을 내리는 대통령…. 전쟁의 역사는 공식적 지위를 가진, 힘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발자취가 대부분이다. 전쟁에서 가장 고통받는 민초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역사에 남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6·25 전쟁도 마찬가지다. 최전선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눴던,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고난과 아픔은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남북 정상이 약속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가 2년만에 흔들리는 지금,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김성태씨(89)는 전쟁 초기 북한군에 포로가 됐다가 2001년 귀환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50년 동안 놓지 않았다. 그를 최근 서울 방배동 사단법인 물망초 사무실에서 만나 50년에 걸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 포로가 된 미군 장병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있다. 게티이미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 포로가 된 미군 장병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있다. 게티이미지

◆인권 대신 죽음의 그림자만 가득했던 포로 생활

1954년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누울 시간이지만 김씨는 눕지 못한 채 앉아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사방 1m 크기의 징벌 독방. 몸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소변도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씻지도 움직일 수도 없으니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김씨가 독방에 갇힌 이유는 탈주였다. 북한에 침투했다가 붙잡힌 남측 공작원들로부터 남한 소식을 들은 김씨는 13년형을 받고 수감된 교화소(교도소)를 탈출했으나 잠복한 경비대원들에게 체포돼 독방에 갇혔다.

김씨는 1948년 3월 경기 포천에서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에 입대했다. 국방경비대원들의 절도있는 태도와 멋진 군복을 보고 나이까지 속여가며 군인이 됐다. 동두천 초성리 소재 7사단 1연대 3대대에 배치된 김씨는 대대장 연락병을 거쳐 의정부 사단본부에 있던 하사관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됐다. 당시 이등중사(하사)였던 김씨는 부대와 함께 양주 덕정에 도착, 산꼭대기에 올라가 대기했다. 오후 4시에 갑작스레 쏟아진 소나기로 38선 일대로 북상하던 보급차량이 전복되는 등 혼란이 가중됐다.다음날 중화기 중대가 왔다. 105㎜ 야포 10문과 박격포 등이 동두천, 적성, 고랑포를 향해 포사격을 했다. 포격을 받은 북한군은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굶주린 채 싸우던 김씨는 인근 농가를 찾아갔다. 농민들은 “고생한다”며 보리밥을 줬다. 

6·25 전쟁 초기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부대가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6·25 전쟁 초기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부대가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서울이 28일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북한군은 120㎜ 박격포를 쐈다. 직경이 2m에 달하는 구덩이가 패일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지닌 박격포탄에 부대원 다수가 죽거나 다쳤다. 하루 정도 지나니 시체 썩는 냄새가 곳곳에서 풍겼다. 포위된 상황에서 중대장이 교전 도중 부상했다. 김씨는 다친 중대장을 업고 산을 내려오다 30일 북한군에 포로가 됐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에 따르면, 북한군 4사단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동두천과 덕정 방면을 공격했다. 국군 7사단의 포천, 동두천 방어선은 25일, 의정부 방어선은 26일 무너졌다. 28일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했고 이승만 정부는 한강교와 광진교를 폭파했다. 한강 이북에서 철수 명령조차 받지 못한 채 싸우던 국군은 뿔뿔이 흩어져 퇴각했다.

김씨가 북한군에 끌려가니 대대 작전참모, 통신참모, 정보참모도 붙잡혀 있었다. 연천으로 이동해 하룻밤을 묵은 김씨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회령으로 옮겨졌다. 옛 일본군 군마훈련소를 개조한 수용소에는 1500명의 포로가 있었다. 그곳에서 ‘인류사회발전법칙’을 비롯한 공산주의 관련 사상교육을 받았다. 

생활환경은 열악했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수용소에서는 전쟁 상황을 알 수 없었다. 30명이 머물던 침실 바닥에는 볏집을 넣은 자루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볏집에서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식사는 잡곡에 시래기국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대여섯 숟갈 뜨면 다 없어졌다.

많은 포로들이 영양실조로 죽었다. 굶주림에 지쳐 수용소 인근에 있던 돼지풀을 베어 소금물에 끓여 먹은 포로들은 몸이 붓다가 죽었다. 자고 일어나서 빗질을 하면 이가 한 사발씩 나왔다. 포로들의 피를 빨아먹는 이였다. 최소한의 생존조차 위협받는 수용소에서 인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4개월 정도 사상교양을 받고 탄광으로 가니 중공군들이 있었다. 동복을 지급받은 포로들은 중국으로, 평안북도 등으로 흩어졌다. 김씨는 1951년 초 평안북도 백마로 이동해 ‘해방전사’로서 훈련을 받으며 몽고말 두 마리를 키우게 됐다. 북한군은 몽골에서 지원받은 말을 ‘무언의 전우’라 칭하며 중시했다. 

백마에서 김씨는 도주를 시도했다. 전선으로 가면 남한으로 갈 수 있을거란 계산이었다. 하지만 평안남도 대동에서 제지를 당했다. 북한군은 “이탈자가 많으니 원대복귀해서 생활하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복귀해서 자아비판을 한 뒤 때를 기다렸다.1953년 5월 강원도 회양으로 이동해 정찰훈련을 받았다. 전선을 정찰하는 임무를 맡으면 남쪽으로 갈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쪽으로 넘어오려고 했지만, 정전협정을 앞둔 7월 18일에 동료 대원의 밀고로 체포됐다. 25일 군사재판에 회부돼 ‘국가반역자’라는 이유로 징역 13년에 선거권 박탈 3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유엔군과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유엔군과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내가 북한에 있었으면 죽은 지도 옛날이오”

원산·평양·함흥교화소에서 보낸 13년은 참혹했다. 겨울에는 동복만 입은 채 추위에 떨었다. 북한 출신 수감자들은 3개월에 한 번은 친척과의 면회를 통해 차입을 받았지만, 혈혈단신이었던 김씨는 도와줄 외부인이 없었다.

휴전 직후인 1954년 북한은 평양복구건설을 시작했다. 김씨도 건설에 투입돼 남포제련소 내 벽돌공장에서 일했다. 식사는 강냉이에 콩이 들어간 밥과 된장 시래기국이 전부였다. 정월 초하루와 공화국 창건일에만 쌀밥 두 끼가 나올 뿐이었다.

일은 많고 고된데 밥은 적으니 몸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갔다. 

당시에는 남한에서 1952~1953년 북한에 침투시켰던 공작원들이 많이 붙잡혀 있었다. 그들은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남한에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했고 국가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걸 듣고 ‘남한은 잘 살고 있구나’ 싶었다. 

김씨는 1954년 3월 함흥교화소에서 또다시 도주했다. 죄를 지은게 없는데 징역 13년의 형벌은 너무나 억울했다. 하지만 잠복한 경비대에 잡혔다. 보름간 독방 생활을 했다. 김씨는 그때 상황을 “(그 안에선) 꼼짝못할 정도였다. 가만히 앉아있다가 눈감으면 자는 거다. 사람이 아니라 해골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몸이 약해진 김씨는 함흥교화소에서 그물과 장갑 만드는 기술을 배우다 1966년 7월 18일 석방, 함경북도 온성의 추원탄광에 배치됐다. 건강이 좋지 않아 지하 100m에서 이뤄지는 채탄을 감당할 수 없었다. “쓰러질 거 같아서 못하겠다”고 하니 굴진 작업을 시켰다. 결핵에 걸려 요양병원에서 3~4개월 동안 치료를 받기도 했다.탄광에서는 평양서 추방된 여자를 소개해줬다. 결혼해 아들 둘을 뒀으나 1978년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부부도 1990년대 초 강도에게 쇠절구로 맞아 사망했다.

6·25 전쟁 당시 한 중공군 병사가 포로가 되고 있다. 게티이미지
6·25 전쟁 당시 한 중공군 병사가 포로가 되고 있다. 게티이미지

27년간 노역한 탄광에서는 국군포로라는 신분 때문에 늘 감시에 시달렸다. 푸에블로호 사건 등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면 보위부가 감시의 눈초리를 보냈다. 출소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감옥생활에 대한 기억은 여전했다. ‘내가 여길 떠나서 고향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던 김씨에게 마지막 탈출에 대한 의지를 심어준 것은 같은 동네에 살던 당원 안호준이었다. 김씨는 맏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간 뒤 2001년 6월 서울에 왔다. 

북한군에 포로로 잡힌 지 50여년만에 돌아온 조국. 김씨는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웠다. 복지관에서 영어와 일본어를 공부하고, 컴퓨터 사용법을 익혔다. 덕분에 컴퓨터로 음악을 듣고 이메일도 보낼 수 있게 됐다. 스마트폰을 내밀면서 “내가 이걸 쓸 줄 아오”라는 말도 했다. 

그는 “정부에 모든 게 감사할 뿐”이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시방(지금) 여든아홉이오. 내가 북한에 있었으면 죽은 지도 옛날이오. 거긴(북한) 환갑을 앞당긴단 말이오. 58세나 59세에. 환갑이 되기 전에 죽을까봐. 사람 못살 곳이 북한이오.”

독립운동사에 찬란한 승리로 기록된 봉오동 전투가 이달로 100주년을 맞았다.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등이 이끈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를 격파한 봉오동 전투는 지난해 영화로도 제작돼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독립군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연해주에 도착한 체코 군단과 제정 러시아 군인들이 갖고 있던 무기 덕분이었다. 일본군 무기와 유사한 성능을 지닌 체코 군단의 무기는 항일무장투쟁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는 계기가 됐다. 

7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봉오동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식에서 배우들이 그때의 모습을 재현하는 기념공연을 하고 있다. 뉴스1
7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봉오동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식에서 배우들이 그때의 모습을 재현하는 기념공연을 하고 있다. 뉴스1

◆극동에서 이어진 한국과 체코의 인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였다. 오스트리아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와 싸우던 체코인들은 러시아에 투항, 오스트리아에 총부리를 겨눴다. 

전쟁 전 러시아로 망명한 체코인들도 합류했다. 자신들이 거주하던 러시아에 대한 충성과 모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애국심이 합쳐진 결과였다. 이들이 모여 창설된 부대가 체코 군단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 직후 집권한 볼셰비키 정부는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프랑스 파리에 있던 체코 망명정부는 체코 군단 4만5000여 명을 프랑스군에 배속시켜 독일군과 싸우기로 했다. 하지만 독일을 가로질러 서부전선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해 내전 중인 러시아를 가로질러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열차 수백 량을 확보한 체코 군단은 병력과 무기, 식량을 싣고 동쪽으로 향했다. 병원과 은행에 우체국, 신문사까지 갖춘 체코 군단의 열차는 ‘움직이는 정부’나 다름없는 ‘설국열차’였다. 이때 발행된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신문에는 3.1 운동에 대한 기사도 포함됐다. 

체코군단 병사들이 훈련을 앞두고 정렬해있다. 위키피디아
체코군단 병사들이 훈련을 앞두고 정렬해있다. 위키피디아

체코 군단은 1918년 6월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했으나 1차 대전이 끝나면서 귀국 준비에 들어갔다. 체코 군단의 마지막 병력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것은 1920년 9월. 이 과정에서 체코 군단 장병들은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조직과 접촉한다. 일본군에 맞설 최신 무기가 필요했던 독립군과 귀국 여비를 마련하려는 체코 군단 장병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였다.

거래가 이뤄진 장소는 연해주의 깊은 숲속이었다. 독립군은 이곳에서 맥심기관총과 수류탄, 소총 등을 구입했다. 일본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독립군은 여러 단계를 거쳐 무기를 소량 구매 후 은밀히 운반했다.

상해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체코 군단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체코 군단은 러시아 내전 당시 가장 강한 전투력을 갖춘 군대였다. 또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체코 군단과 우호 관계를 구축하면 한국의 독립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국제사회에 확산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실제로 여운형, 안창호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해에서 체코 군단 지도자를 만났고, 연해주 일대 독립운동단체도 접촉을 시도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탑승한 체코군단 장병들이 기관총을 화차 위에 거치한 채 대기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탑승한 체코군단 장병들이 기관총을 화차 위에 거치한 채 대기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만주 일대에 밀정을 파견했던 조선총독부와 만주 주둔 일본군은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1920년 7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신(申)이라는 자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출현해 체코군 총기 5만정, 기관총과 수류탄 5000발을 소량씩 매입해 배와 중국마차로 비밀리에 보내고 있다”는 기밀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하얼빈 주둔 일본군 간부가 현지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무관에게 “체코 군인들이 한국인들에게 총기를 1정 당 120루블에 팔고 있다”고 항의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같은 상황은 체코 군단에 상당한 부담이 됐다. 당시 일본군과 정부는 체코 군단을 지원하고 있었다. 체코 군단도 귀국을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독립군에 대한 무기 판매가 이뤄진 것은 금전적인 이해관계 외에도 같은 약소민족이라는 동병상련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군은 미국서 만든 러시아 소총을 썼다

독립군이 가장 많이 필요로 했던 무기는 소총이었다. 매복과 기습을 위해서는 신속한 이동이 필수다. 야포 등 중화기보다는 휴대가 용이한 소총이 더 필요한 이유다.

독립군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무기 제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기술적, 재정적 문제로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다양한 경로로 무기를 구매해 사용했다.

우정사업본부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최초의 승리를 거둔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 68만8000장을 발행한다고 4일 밝혔다. 기념우표에는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양화가 임직순의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가 담겼다. 우정사업본부 제공
우정사업본부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최초의 승리를 거둔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 68만8000장을 발행한다고 4일 밝혔다. 기념우표에는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양화가 임직순의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가 담겼다. 우정사업본부 제공

당시 독립군은 러시아산 모신나강 소총을 주로 썼다.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나 1차 대전 기간에 밀반입한 독일산 소총 등도 일부 사용했지만, 대량으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러시아혁명 직후 제정 러시아 군인들과 체코 군단 장병들이 무기를 대량으로 팔면서 민간 시장에서도 모신나강 소총을 쉽게 살 수 있었다. 이들이 판매한 모신나강 소총은 독립군에 유입됐다.

흥미로운 부분은 체코 군단이 갖고 있던 모신나강 소총 중 상당수가 미국에서 생산된 무기라는 점이다. 

1차 대전 개전 당시 러시아는 98개 보병사단과 37개 기병사단을 독일 방면으로 보냈다. 이들에게 지급된 모신나강 소총은 150만정에 달했다. 하지만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15만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내면서 이와 동일한 규모의 소총도 사라졌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신병들에게 지급할 소총 수요도 폭증했다. 

하지만 산업 기반이 미비해 군대에 지급할 모신나강 소총을 자체적으로 충당할 수 없었던 제정 러시아는 미국과 일본에 수백만정의 소총을 주문했다. 이때 생산된 소총 중 일부는 체코 군단에 지급됐다.  

카자흐스탄에 있는 홍범도 장군 동상. 국방홍보원 제공
카자흐스탄에 있는 홍범도 장군 동상. 국방홍보원 제공

하지만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은 모신나강 소총 공급을 중단한다. 납품하지 못한 소총은 러시아혁명에 개입한 연합군과 체코 군단에 인도됐다. 체코 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면서 판매한 무기가 독립군의 손에 들어온 셈이다. 체코 군단이 팔았다고 해서 체코산 무기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미국에서 제작된 러시아 소총이다.  

독립군은 이렇게 확보한 무기로 화력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 참가한 독립군의 사진이나 기록화에는 맥심 기관총과 모신나강 소총으로 추정되는 무기가 포착된다. 비록 미국에서 만들어진 모신나강 소총이 혹한의 시베리아 추위에 파손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무기를 자체 제작할 수 없었던 독립군에게는 귀중한 존재였다. 이같은 무기를 공급한 사람들이 항일 무장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의 숨은 조력자들이다. 

군사분계선(MDL)을 포함한 비무장지대(DMZ)는 남북한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곳이다. 6.25 전쟁과 정전협정의 당사자인 남북한 군대와 유엔군사령부는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DMZ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갈등과 반목, 경쟁, 충돌, 대화를 거듭해왔다. 

비무장지대(DMZ)와 인접한 일반전초(GOP) 통문 너머로 DMZ가 보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비무장지대(DMZ)와 인접한 일반전초(GOP) 통문 너머로 DMZ가 보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같은 긴장은 2018년 9.19 남북 군사합의가 체결되면서 다소 가라앉았다. 하지만 지난달 26일 유엔사가 같은달 3일 강원도 철원 DMZ 내 우리측 감시초소(GP)에 대한 북한의 총격과 우리 군의 대응에 대해 “남북한 모두 정전협정을 위반했다”고 발표하고, 군 당국이 “현장부대의 대응은 적절했다”며 유감을 표명하면서 3자간 갈등은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에 더해 북한은 남측을 ‘적(敵)’으로 규정하고 대남사업을 대적(對敵)사업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지난 4일 “그것이 개성공업지구의 완전 철거가 될지, 있어야 시끄럽기밖에 더하지 않은 북남 공동연락사무소 폐쇄가 될지, 있으나 마나 한 북남 군사합의 파기가 될지 하여튼 단단히 각오는 해둬야 할 것”이라며 군사합의 폐지를 언급했다. DMZ 위기관리의 두 축인 정전협정과 군사합의가 모두 흔들리는 셈이다.파워사다리

◆군 “군사합의, 긴장완화 기여” 강조…도발 대비도

국방부는 남북 군사합의가 한반도 긴장완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모습이다.

지난 10일 정경두 국방부장관 주재로 열린 전반기 전군주요지휘관 회의에서는 “남북 군사합의가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하면서 “상호 적대행위 중지에 따라 남북 접경지역에서의 군사 상황은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정 장관은 이날 회의에서 “북한이 9.19 남북 군사합의 파기,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폐쇄, 남북 간 통신선 차단 등을 거론하며 우리 정부를 비난하고 있다”며 “현 북한 상황 등을 고려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완벽히 대응할 수 있는 군사대비태세 유지를 특별히 강조한다”고 지시했다. 군사합의 파기로 인한 군사도발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경기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 너머로 북한 황해도 개풍군 마을이 보이고 있다. 파주=남정탁 기자
경기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 너머로 북한 황해도 개풍군 마을이 보이고 있다. 파주=남정탁 기자

남북간 통신선을 차단한 북한은 어떤 형태로든 군사행동에 나서리라는 관측이 많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은 중단된 상태라 이에 대한 조치는 실효성이 없다. 현 정부가 남북관계의 주요 성과로 평가하는 군사적 긴장 완화 조치를 흔들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탄도미사일이나 방사포 발사,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탑재 3000t급 잠수함 진수식 등이 거론되지만, DMZ에서 도발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북한은 2015년 DMZ에서 지뢰 및 포격도발을 감행해 한반도를 전쟁 직전 단계로 몰아간 전례가 있다. 다만 이같은 도발은 남북 군사합의를 완전히 깨는 것으로, 북한이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이에 따라 DMZ에서의 저강도 도발 가능성이 제기된다. 1953년 정전협정 당시 MDL을 따라 설치한 팻말을 점검한다는 명목으로 북한군 수색대를 MDL에 근접시키거나, DMZ 내 수색정찰을 강화하는 등의 군사적 움직임이 있을 수 있다. 

지난달 GP 총격처럼 우리측 GP를 향해 총격을 가하거나 탈북자 단체가 띄운 대북전단 풍선을 격추하기 위해 고사총을 발사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행동들은 북한이 2014년부터 1년 넘게 DMZ에서 실시했던 전례가 있다. 위기를 크게 확대하지 않으면서 우리 군과 정부 당국을 곤혹스럽게 할 수 있는 도발이다.

우리 군의 대응을 놓고 유엔사와 국방부간 의견차를 심화시킬 수도 있다. 과잉대응 논란을 비껴가면서 북한 도발에 맞서는 섬세한 전략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 10일 개최를 예고한 최고인민회의를 앞두고 인민군 박격포병 구분대 포사격훈련을 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이날 훈련은 각 구분대별로 명중 발수 등을 비교하는 순위 겨루기 방식으로 진행됐다. 연합뉴스·조선중앙TV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 10일 개최를 예고한 최고인민회의를 앞두고 인민군 박격포병 구분대 포사격훈련을 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이날 훈련은 각 구분대별로 명중 발수 등을 비교하는 순위 겨루기 방식으로 진행됐다. 연합뉴스·조선중앙TV

◆유엔사와 갈등 표출에 北 도발 우려까지

문제는 이같은 전략이 얼마나 실효를 거둘 지는 미지수라는 점이다. DMZ를 실질적으로 관할하는 유엔사와의 관계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DMZ에서 발생한 총격을 바라보는 유엔사와 우리 군의 시각차는 북한 도발 대응에 영향을 미친다. 

유엔사는 2000년대 월터 샤프, 제임스 서먼 사령관 시절까지만 해도 북한군의 총격에 대한 우리 군의 대응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자위권 차원으로 해석한 것이다. 2010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도발 직후에도 이같은 기조는 어느 정도 유지됐다.동행복권파워볼

하지만 2013년 10월 커티스 스캐퍼로티 사령관이 부임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2015년 6월 주한미군사령부와 유엔군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가 공동 발간하는 ‘전략 다이제스트’는 “2014년 한국군이 DMZ와 MDL에 접근하는 북한군을 향해 11차례 대응사격했다”며 “치명적 부대 운용 전 적의 의도와 조치를 정확히 평가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2015년 8월 DMZ 지뢰도발 직후 취재진들이 현장을 방문, 당시 정황을 살피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2015년 8월 DMZ 지뢰도발 직후 취재진들이 현장을 방문, 당시 정황을 살피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당시 합참이 국회에 보고한 2014년 남북 총격전 횟수는 5회. 우리 군이 공개하지 않은 총격전을 공개하면서 “무턱대고 방아쇠를 당기지 말고 북한 의도부터 파악하라”고 경고한 셈이다. 비공개 자료와 비판적 언급을 공식 책자에 기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스캐퍼로티 사령관 시절 유엔사의 시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다.

2014년은 북한군 MDL 접근→우리 군 경고사격→북한군 복귀라는 패턴이 수차례 반복되던 시기였다. 우리 군은 “북한군이 MDL에 접근하고 있어 불가피했다”는 입장이었지만, 유엔사는 “한국군이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2010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우리 군의 대응이 강경해진 것과 관련이 있다. 2014년 DMZ에서의 경고사격은 K-3와 K-6 기관총이 주류를 이뤘고, 발사 수도 20~30여발에 달했다. 

유엔사는 이같은 대응기조가 정전협정에 규정된 비례성의 원칙과 다르다고 해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캐퍼로티 사령관을 비롯한 당시 주한미군과 유엔사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확전’ 우려를 표명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2015년 북한의 DMZ 지뢰 및 포격 도발 직후 우리 군이 원점 타격을 하는 대신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를 차량들이 오가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를 차량들이 오가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지금, 유엔사의 시각은 그때와 달라졌을까. 지난 3일 북한 GP 총격을 조사한 유엔사는 공개 발표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비공개 조사보고서에서는 북한군의 4발 총격에 한국군이 30발을 쏜 것은 과잉대응이었다고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워볼사이트

DMZ에서의 대북 대응을 둘러싼 유엔사와 한국군의 시각차는 6년이 지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던 셈이다. 시각차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면, 양측의 이견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유엔사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동영상까지 올리면서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우리 군이 공개 반발한 것은 ‘예고된 충돌’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북한은 남북 군사합의 폐기 카드를 꺼냈다. 정전협정과 더불어 DMZ에서의 군사적 긴장 고조를 방지하는 정치적 합의를 흔든다는 것은 DMZ를 또다시 갈등과 충돌의 장소로 만들 수 있다. 북한 도발에 대응하는 방법을 놓고 유엔사와의 시각차가 드러난 상황에서 북한이 DMZ를 무대로 예기치 않은 ‘창조적 도발’에 나선다면, 우리 군과 정부는 북한이 공언한 것처럼 골치를 앓을 수도 있다. 불확실성이 점증하는 현재의 국면이 우려스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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